차가 생기면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세종대왕의 왕릉을 찾아가 보는 것이었다.
막상 차가 생기고 나니 단순히 일회성의 답사 보다는 뭔가 내 자신에게 공부가 되고 추억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져서 내가 평소 존경하는 세종대왕의 생애와 사상을 그가 지나왔던 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이해하는 世宗 追跡傳을 생각하게 됐다.
이 기행은 세종대왕의 왕릉이 있는 여주에서 부터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간의 흐름의 역방향으로 세종 대왕을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시작부터 끝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나는 조금 다른 각도로 보기 위해서 인물의 생의 끝인 왕릉에서 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알아가 보기로 했다.
[영릉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 소재한다.]
자동차를 타고 갔을 때는 몰랐는데, 지도로 보니 남한강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오른편 사진은 영릉관리사무소 옆에 게시되어있는 안내 그림이다. 이 그림처럼 영릉은 세종대왕릉(英陵)과 효종대왕릉(寧陵)이 나란히 있다. 이번 답사는 세종대왕을 알기위한 답사이므로 효종대왕릉엔 가지 않았다.
관리 사무소에서 표를 끊고 그 옆에 있던 간단한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안내판을 봤다.
간단한 이란 형용사를 사용 했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세종대왕의 업적들이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이 나열되어 있다.
이색적인 것은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내곡동)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겨 왔다고 적혀있는 것이다.
원래 세종이 승하 하셨을 때 여주가 아닌 서울 헌릉 서쪽에 묻히셨던 것을 무슨 이유에서 인지 예종 때 이장 한 것이다.
잠깐 인터넷 검색을 하니, 세종 이후에 문종,단종, 세조가 모두 좋지 않으니 세종의 영릉의 위치가 길하지 않다 하여 옮긴 듯 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세종의 묫자리가 나쁜 것 만이 이유일까 의구심을 갖게 한다.
문종은 병약하여 그랬다 치지만, 단종은 세조가 권력 욕에 눈이 멀어 살해되고, 세조 자신도 많은 사람들을 해하여서 심적으로 괴로워 하다 마지막을 맞이했을 것이다.
재실에서 홍살문까지이어지는 길에는 아름 다운 소나무들이 멋지게 자라고 있다.
정자각의 오른쪽에 있는 영릉비.
영릉비 옆에 1983년에 세운 영릉비문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술하고 있다.
다른 미사어구가 들어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정말 많은 일을 하신 분이었다.
세종대왕릉에서 내려다 본 정자각.
업적에 비해서 왕릉은 소박한 느낌을 받았다.
왕릉에서 내려오는 오른편에 있는 전시관에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 되어있다.
물론, 진품들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세종대왕님의 업적의 방대함이나 폭넓은 관심에 대해 놀라울 뿐이다.
용비어천가
불휘기픈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은 조선시대 살인사건 발생시의 사체(死體) 조사 지침서이다. 상·하 2권 1책으로 목활자본이다. 원(元)나라의 『무원록(無寃錄)』을 저본으로 하여 편찬하였다. 1438년 세종의 명으로 『무원록』에 최치운(崔致雲)·이세형(李世衡)·변효문(卞孝文)·김황(金滉) 등이 주해(註解)를 더하고 음훈(音訓)을 붙여 편찬하였으며, 1440년에 완성되어 각 도에 반포되었다.
요런 귀여운 해시계라면 양반들의 간지나는 패션 아이템이였을 듯하다. 제작 연대가 20세기 초란다.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지만,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 볼 계획이기 때문에,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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