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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서울 모터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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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살아 계시던 몇년 전에 갔었던 서울 모터쇼. 자동차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앞으로 전기차 시대가 올지 궁금해서 오랜만에 찾게 다시 찾게 되었다. 사람들도 많고 길에 이 사람들이 타고 온 차들도 많았다. 사실 올 해는 볼만 한 것은 없었다. 신차도 없고 전기차등 새로운 트렌들를 엿볼 수있는 것들은 중소기업뿐이었다.  렉서스에서 공개한 일인용 비행기(?),나르는 호버보드   장애인을 위한 보조 기구  전기차 시대가 오면 꼭 필요할 긴급 충전차 (과연 실제로 빠른 시간에 충전이 가능할까?)  도요타의 전기차 프리우스  GM의 전기차 볼트 EV  기아차의 스팅어 노랑색이 멋지다.  파워프라자의 예쁘자나R2  캠시스의 전기차들 픽업트럭 푸드트럭 전기차에 들어가는 부품들을 생산하는 업체 이 업체도 전기차 시대가 외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네이버의 자율 주행 연구   아름 다운 벤츠의 자동차  벤츠와 협업하는 LG와 KT

[世宗追跡傳] 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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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원래 서초구 도곡동에 있는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묘인 헌릉 서쪽에 묻혔었다고 한다. 서울시 서초구 헌인릉길 34 내가 가 본 헌릉은 세계유산이라는 자랑스런 비석에 비해서 큰길에서 입구를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화훼단지 비닐 하우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왕릉에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과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인 인릉이 나란히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세종대왕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헌릉 서쪽이라고 하는데 헌릉의 서쪽은 인릉 쪽인데, 묫자리가 안좋아서 이장 했다고 하는 예종 시대의 기록이 이상하게 느껴 진다. 문종, 단종, 세조로 이어지는 왕실의 어려움이 과연 세종대왕의 묫자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버지 세조의 악행을 세종의 묫자리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세종이 마지막 임종을 맞이하신 영응대군의 집은 지금은 풍문 여고가 들어서 있다. 여고 정문 사진을 찍으려다 아무 의미 없는 짓인 것 같아서 근처의 북촌을 돌아 봤다. 세종은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 까? 허약하지만 훌륭한 인재인 큰아들 문종과 야심많은 둘째아들을 두고 걱정하진 않았을 까?

[世宗追跡傳] 영릉에서 첫 답사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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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생기면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세종대왕의 왕릉을 찾아가 보는 것이었다. 막상 차가 생기고 나니 단순히 일회성의 답사 보다는 뭔가 내 자신에게 공부가 되고 추억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져서 내가 평소 존경하는 세종대왕의 생애와 사상을 그가 지나왔던 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이해하는 世宗 追跡傳을 생각하게 됐다. 이 기행은 세종대왕의 왕릉이 있는 여주에서 부터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간의 흐름의 역방향으로 세종 대왕을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시작부터 끝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나는 조금 다른 각도로 보기 위해서 인물의 생의 끝인 왕릉에서 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알아가 보기로 했다. [영릉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 소재한다.] 자동차를 타고 갔을 때는 몰랐는데, 지도로 보니 남한강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오른편 사진은 영릉관리사무소 옆에 게시되어있는 안내 그림이다. 이 그림처럼 영릉은 세종대왕릉( 英陵)과 효종대왕릉(寧陵)이 나란히 있다. 이번 답사는 세종대왕을 알기위한 답사이므로 효종대왕릉엔 가지 않았다. 관리 사무소에서 표를 끊고 그 옆에 있던 간단한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안내판을 봤다. 간단한 이란 형용사를 사용 했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세종대왕의 업적들이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이 나열되어 있다. 이색적인 것은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내곡동)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겨 왔다고 적혀있는 것이다. 원래 세종이 승하 하셨을 때 여주가 아닌 서울 헌릉 서쪽에 묻히셨던 것을 무슨 이유에서 인지 예종 때 이장 한 것이다. 잠깐 인터넷 검색을 하니, 세종 이후에 문종,단종, 세조가 모두 좋지 않으니 세종의 영릉의 위치가 길하지 않다 하여 옮긴 듯 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세종의 묫자리가 나쁜 것 만이

삼전도비를 보고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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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국회의원 선거날 이었다 . 나는 투표를 하고 그전 부터 마음 먹고있었던 삼전도비를 찾아갔다 . 송파구 석촌동 주택가에 있는 이비는 청나라 태종이 병자호란이 끝난뒤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 우리나라로서는 아주 치욕적인 비가 아닐 수가 없다 . 임진왜란 직후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펼쳤다 . 약해진 명나라대신 동북아의 강자로 떠오르는 여진의 후예인 후금 ( 이후 청나라 ) 을 상대할 힘이 조선에는 아직없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친명 세력이 득세를 하게되고 , 후금은 명과의 일전을 앞두고 배후의 두려움을 없애기위해서 정묘호란 ,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 여진족은 볼래 말갈족의 일파이다 . 말갈족이라면 알다시피 대진국 ( 발해 ) 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 즉 우리민족과 형제나 다름없는 종족인것이다 . 고구려 1000 년의 역사속에서 우리의 피지배계층 혹은 연맹의 한 부족이었다 . 혹자는 정묘나 병자의 호란은 그들의 의도보다 조선의 척화파의 득세로 인한 정책의 변화가 주요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 내 생각엔 때론 주종관계로 때론 형제의 관계로 지내기도 했던 나라였지만 , 청나라의 기반이 다져지면서 명나라처럼 주종관계를 요구했을 것이다 . 우리쪽 정책이 척화로의 급선회 될 때, 자신감 만큼 준비되지않은 군사력의 약세를 고려하지 못한 무모한 친명정책이 패인인 것 같다 . 잘 보이는 지 모르겠지만 , 이 삼전도비의 본래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다 . 침략해와서 무수한 인명을 앗아갔을 텐데 , 공덕비라니 '역사는 힘이 있는 자가 정의이고 진리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 국회의원 선거를 했다 . 예전에는 성군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었다 . 하지만 , 현재는 그렇지 않다 . 성군은 국민들이 올바른 여론으로, 깨여 있는 의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